"한양대 가려고 고려대 숙소에서 야반도주했죠"

김종수 2022. 9. 13.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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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수의 농구人터뷰(53)] '코트의 신사' 최명룡

 

KBL 원년 시즌 챔피언결정전은 이른바 대박 매치업으로 관심을 모았다. 최종 승자를 가리는 마지막 시리즈에서 기아 엔터프라이즈(현 현대모비스)와 나래 블루버드(현 DB)가 맞붙었기 때문이다. ‘대이변’. ‘꼴찌 후보의 반란’ 등 당시 평가에서도 알 수 있듯이 기아와 나래가 최종 무대에서 우승을 놓고 다툴 것으로 예상한 이들은 거의 없었다. 그만큼 양팀은 시즌 전부터 입지 자체가 달랐기 때문이다.


허재, 강동희, 김유택, 김영만 등 농구대잔치 스타들이 즐비하던 기아는 우승 후보 0순위로 꼽히던 강호였다. 화려한 토종 라인에 클리프 리드와 로버트 윌커슨이라는 강력한 빅맨형 외국인 선수까지 확보한 상태였던지라 어떤 팀과 맞붙어도 전력에서 우위를 가져갈만 했다. 최고 테크니션 허재를 중용하지 않고도 정규리그 1위, 챔피언결정전을 모두 독식한 것이 이를 증명한다.


반면 상무의 참가가 무산되면서 대타로 창단한 나래는 상황이 달랐다. 한국산업은행과 한국은행 선수들을 모아서 어렵사리 팀을 만들었던지라 당시 참가팀 중 최약체로 평가받았다. 정인교 정도를 제외하고는 상대팀에게 위협감을 주는 빅네임이 전무했다. 하지만 역시 스포츠의 최대 매력은 ‘결과를 알 수 없다’는 사실이다. 정규리그 3위라는 성적으로 주변을 깜짝 놀라게한 나래는 비록 우승은 놓쳤지만 챔피언결정전까지 진출하며 신흥 명문으로 떠올랐다.


여기에는 ‘코트의 신사’로 불리던 최명룡(70‧184cm)의 힘이 컸다. 본인 역시 나래 전신 산업은행에서 선수와 코치로 활약한바 있던 그는 당시 상황에 맞는 최적의 외국인 선수진을 구성한 것을 비롯 기존 토종 선수들의 조합도 적절하게 잘 가져가며 삽시간에 꼴찌 후보를 탄탄한 전력으로 변화시켰다.


당시 나래를 이끌던 투탑은 단연 테크니션 빅맨 제이슨 윌리포드(194.4cm)와 득점 머신 칼 레이 해리스(188㎝)였다. 해리스가 득점을 이끌어가는 가운데 윌리포드가 내외곽을 오가면서 중심을 잡아주던 구성은 화력 부재가 우려됐던 나래의 공격 파워를 삽시간에 끌어올리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중요한 것은 그런 외국인조합을 직접 뽑아 만들어낸 인물이 바로 최명룡이라는 사실이다.


프로 초창기 대부분 팀들은 탄력 좋은 흑인 선수들이 펑펑 꽂아대는 덩크슛 등에 매료됐다. 자료가 많지 않은 가운데 그런 선수들이 눈에 먼저 들어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명룡은 달랐다. 단신 외국인 선수로 대부분 제럴드 워커에 빠져있을 때 해리스의 득점력에 더 주목했고 이후 기지를 발휘해서 타팀의 관심 밖에 있었던 윌리포드라는 숨은 보석까지 손에 넣을 수 있었다.


해리스와 윌리포드로 구성된 외국인 선수진은 나래에 어떤 팀과도 맞불이 가능한 힘을 안겨주었고 이는 기존 선수들과의 적절한 시너지로 연결됐다. 특히 간판스타로 불리던 정인교는 슛은 정확했지만 직접 득점을 만들어내거나 기동력이 좋은 스타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두 외국인 선수로 인해 만들어진 빈 공간에서 특유의 고감도 슛을 마음껏 쏘아대며 자신의 능력치를 최대한 끌어낼 수 있었다는 평가다.


거기에 파이팅 넘치는 수비가 인상적이었던 강병수와 안정적인 리딩의 이인규 그리고 장윤섭, 이승학, 김상준 등의 투지 넘치는 플레이까지…, 나래는 경기를 거듭할수록 단단해지는 모습을 보여갔다. 성적은 곧 인기로 연결된다. 프로스포츠에 목말라 있던 원주 팬들은 나래의 예상을 깬 활약에 열광했고 일약 농구의 도시로 탈바꿈한다.


감독 최명룡은 커리어가 길지 않은 관계로 명장으로서는 많이 언급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원주 팬들에게는 다르다. 첫 시즌부터 원주의 자부심을 높여주었고 정통의 명문이 되는데 기틀을 마련해주었다는 점에서 매우 특별한 인물이다. 때문에 최근까지도 원주 팬들은 최명룡을 잊지않고 있고, 최명룡 또한 당시를 본인 농구 인생에서 무척 의미깊었던 순간으로 꼽고 있다.
 

 

 

“연예인이 된다고 했으면 딸의 미스코리아 참가를 막았을거에요”

​Q.요새 어떻게 지내세요?
나이는 칠십이 넘었지만 그래도 계속해서 뭔가를 하고 있어요. 체력 멀쩡하고 총기 살아있으면 가만히 있는게 더 안 좋아요.(웃음) 지금은 블록체인 관련 사업을 하고 있는데 직책은 회장을 맡고 있지만 사실상 일은 후배들이 다 하고 있죠. 부지런한 후배들이 함께 해줘서 너무 든든하고 좋습니다. 시작한지는 한 4년 정도 됐는데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가려고 합니다.

​Q.시간이 꽤 지나기는 했지만 2003미스코리아선발대회 당시 ‘진’에 뽑힌 최윤영이 농구인 최명룡의 딸로 화제를 모은바 있어요.
딸만 둘인데 그 녀석이 둘째에요. 당시 캐나다에 있는 브리시티시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심리학을 전공하고 있었는데 어느날 갑자기 미스코리아 대회에 나가겠다는거에요. 솔직히 처음에는 탐탁치 않았어요. 언제부터인가 미스코리아가 연예인이 되기 위한 등용문같은 역할을 하고 있잖아요. 딸이 그쪽으로 가는 것은 바라지 않고 있었거든요. 거기에 대해 당시 윤영이가 일단 연예인이 될 생각은 일절 없다고 먼저 밝혔어요. 더불어 각계각층의 어려운 사람들을 두루 돕는 심리치료사가 되고 싶은데 거기에 미스코리아 타이틀도 있으면 도움이 될 것이다고 말하더라고요. 평범한 심리치료사보다는 아무래도 뭔가 눈에 띄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쪽이 더 많은 사람들을 두루두루 만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는 말에 저도 딸의 뜻을 이해하게 됐어요.

​Q.그럼 당초 약속대로 미스코리아가 되고 난후에도 연예계 활동은 일절 안한 것인가요?
맞습니다. 미스코리아 진을 비롯 미스코리아 서울 진, 미스 유니버스 코리아까지 모두 겸하는등 짧은 시간에 많은 관심을 받았지만 약속대로 연예계 활동은 하지 않았죠. 애당초 관심이 없기도 했고요. 간혹 몇몇 프로그램에 모습을 비치기는 했지만 말 그대로 게스트였습니다. 어디까지나 윤영이가 가야할 길은 따로 있었으니까요. 그런 윤영이를 신기하게 생각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어요.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당시만 해도 미스코리아 타이틀을 가진 이는 십중팔구 연예계 쪽으로 뛰어드는 경우가 다반사였으니까요. 윤영이는 소탈한 아이입니다. 학창시절에 세운 자신의 목표 외에 다른 길은 쳐다보지 않았고 현재는 평범하지만 사람 좋은 샐러리맨과 결혼해 행복하게 잘 살아가고 있습니다.

 

 

“야간에 개인 연습하다가 선생님에게 쫓겨난 적도 여러 번입니다”

​Q.덕수중학교 1학년 시절 키가 크다는 이유로 권유를 받고 농구를 시작했지만, 농구부가 3개월 만에 해체되는 일을 겪었다고 들었어요.

한마디로 어처구니가 없고 황당했죠. 충격도 컸고요. 말 그대로 공중에 붕 뜬거잖아요. 고등학교 진학 후에 농구를 다시 할 수 있었으니까 사실상 고1때부터 농구를 시작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죠. 처음에는 농구가 인연이 아닌가보다 싶었어요. 그래서 공부만 했는데 농구에 대한 미련이 자꾸 남더라고요. 그냥 농구가 좋았어요. 중학교 3학년 때인가 장충체육관에서 국제대회가 열렸는데 수업도 빠지고 몰래 보고 왔다가 선생님은 물론 부모님한테도 엄청 혼났던 기억이 나요. 그만큼 농구에 대한 미련이 많이 남았던 듯 싶어요.

​Q.다른 또래들에 비해 너무 늦게 시작한 상황인지라 기본기도 부족했을 것이고 일단 정상적으로 훈련을 따라가기도 힘들었을 듯 싶어요.
힘들었죠. 빠른 친구들은 초등학교 3~4학년때부터 농구공을 잡았는데 고등학교 들어가서 시작한다는 것은 격차가 커도 너무 컸잖아요. 어찌보면 무모할 정도였죠. 그런 상황에서 방법이 따로 있을까요. 무조건 죽자고 열심히 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마도 제 농구 인생에서 고등학교 3년이 가장 치열하게 훈련했던 때가 아닐까 싶어요.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서 이미 벌어질 데로 벌어져 버린 또래들과의 격차를 조금이라도 줄여보려면 남들 쉴 때 조금이라도 더하는 방법 외에는 도리가 없었죠. 그래도 당시 기준으로 키는 좀 있는 편인지라 1학년 때는 센터를 보고 이후 2학년때 포워드를 거쳐 3학년이 되어서야 슈팅가드를 볼 수 있었죠.

​Q.당시 본인의 장점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짧은 시간에 센터에서 슈팅가드로 간 것을 보면 슈팅 능력은 좋았던 듯 싶어요.
슛은 잘 던졌던 것 같아요. 저도 그런 플레이를 선호했고요. 나름 신장도 있었고 그 정도 사이즈에 2번을 맡았다는 것은 좋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것 외에는 딱히 다른 장점이 있었을까 싶네요. 기본기라던지 개인기는 당연히 떨어질 수밖에 없었고요. 어쨌거나 당시는 지금처럼 훈련 방법이 체계적이고 디테일하지 않았어요. 때문에 저뿐 아니라 대부분 선수들이 전체적으로 유연성이 떨어졌던 듯 싶고 각자의 재능도 제대로 못 살리는 경우가 태반이었죠. 슈터는 근육 생기면 슛에 방해가 된다고 웨이트 트레이닝도 안 시키던 때니까요. 그렇게 무지하던 시대였어요. 흑백 텔레비전 시대잖아요. 농구에 대한 지식이나 식견도 세계적인 수준과는 차이가 많이 났던지라 NBA중계를 보면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었어요. 그냥 무지하게 큰 선수들이 참 잘한다 정도? 윌트 체임벌린이 노란색 헤어밴드를 하고나와도 흑백으로 보니까 뭐가 뭔지 알 수 있겠어요. 그냥 흑백 특성상 하얀색같이 보이니까 하얀색 헤어밴드를 차고 나왔구나 그러고는 했죠. 지금 선수들은 정말 너무너무 좋은 환경에서 농구하는거에요.

​Q.그래도 그 시절 선수들이 훈련량이나 집념 등에서는 남달랐을 듯 싶어요.
아무래도 그랬겠죠. 체계적인 훈련시스템 등이 없던지라 무조건 많이 훈련하고 부상을 당해도 정신력으로 버티는게 미덕이라고 여겨졌던 시절이니까요. 하체 근육 만든다고 오리걸음, 토끼뜀으로 훈련을 시키던게 당시 코치들이에요. 그러다가 무릎 나가버리는 친구들이 한둘이 아니었죠. 좋은 재능을 지니고 있었어도 그렇게 사라지는 케이스도 적지 않았을거에요. 그래도 다들 ‘이것 아니면 죽는다’라는 생각들을 가지고 있어서 그런 상황에서도 투지를 발휘했어요. 사실 그 엄청난 훈련량을 버티는 것만으로도 엄청 대단하거든요. 하지만 그 시절 어느 정도 이름을 남긴 선수들은 다들 지독했어요. 그것을 싹 소화하고 개인 훈련까지 따로 한다니까요. 저도 정말 열심히 했지만 거기에 못지않은 연습벌레들은 각 학교별로 많았어요. 당장 생각나는 것이 송도고 선배들이에요. 저와 학교는 다르지만 어쨌든 (김)동광이형이 1년 선배거든요. 당시 그 형과 동기생들은 고등학교 3년 내내 단 하루도 안쉬었다고 하더라고요. 정말 대단한 사람들이죠. 그렇게 했으니까 동광이형도 한 시대를 풍미한 전설로 이름을 남기지 않았나 싶어요.
 


​Q.훈련량이라면 본인도 엄청나셨잖아요.
하하핫…. 그러게요. 누가 더 열심해 했냐는 서로 재볼 수 없는 것이고 저 또한 정해진 여건하에서는 정말 최선을 다했던 시절이었습니다. 밤 10시가 훌쩍 넘어서 집에 들어갔음에도 불구하고 새벽 4시 30분 정도에는 어김없이 일어났어요. 완전 깡촌이라 집 근처가 다 흙길이고 아스팔트가 깔려 있는 지점이 일대에 딱 한곳 있었거든요. 그곳까지 농구공을 가지고 뛰어가는거에요. 거기서 혼자 드리블 연습도 하고 이것저것 해보는거죠. 그리고 근처에 언덕이 하나있는데 거기에서 뛰어 내려오는 훈련도 했어요. 언덕의 경사가 상당했던지라 자칫하면 다칠 우려가 있었는데 그러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겠어요? 다리가 꼬이거나 다치지 않을 만큼 정말 빠르게 뛰어야 했죠. 지금 생각해보면 그야말로 왜 그랬을까 싶어요. 그러다 크게 다치기라도 했으면…, 하지만 당시에는 누구 하나 제대로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었으니까요.


​Q.밤늦게 체육관에서 촛불을 켜고 슛연습을 했다는 일화도 들었어요.
뭐 필사적으로 연습하던 시절이었으니까요. 조그만 짜투리 시간마저도 아까웠죠. 점심도 최대한 빨리 먹고 짝궁한테 부탁해서 공 좀 잡아달라고 하고 슛 연습하고, 오후 훈련마치고 나면 학교 인근 중화요리집에서 짜장면 곱빼기를 흡입하다시피 해서 먹고 야간 훈련에 들어갔죠. 그때 짜장면 값이 30원인가 그랬을거에요. 그래도 당시 제가 다니던 학교는 사정이 나았던 편이에요. 그나마 체육관이 있던 학교 중 하나였거든요. 문제는 체육관이 너무 낮아서 농구 골대까지 덩달아 낮았다는 점이에요. 그러다보니 포물선을 높게 그리면서 정석적으로 던지면 천장에 공이 걸려요. 어쩔 수 없이 직사포같이 낮게 던질 수밖에 없었죠. 그러다보니 여기 출신들은 하나같이 슛 포물선이 낮아요. 어쨌거나 그렇게라도 하려고 형광등 키고 연습 좀 하고 있으면 선생님이 달려나와서 ‘야 이 새끼야. 네가 이 학교 등록금 다내냐? 불세(전기세) 나가게뭐하는 짓이냐’며 불호령을 냈죠. 어쩔 수 없이 문방구에가서 초를 하나 사다가 불을 붙여서 창틀에다 놓고 슛을 던지고 그랬는데 또 그러면 ‘체육관 불나면 책임질거냐’며 노발대발했습니다. 그렇게 쫓겨나다시피 운동장으로 나가서 달빛에 비춰서 운동을 하는 경우도 많았는데, 거기 골대는 또 그물이 없어서 슛연습이 잘안됐어요. 그러면 일단 슛은 포기하고 드리블, 드라이브인 연습 등을 했죠.

“고려대를 탈출해서 한양대를 선택한 이유요?”

​Q.동기들과의 의리를 위해서 고려대 행을 스스로 박차버렸습니다.

의리가 작용한 것은 맞지만 무슨 친구들을 위해 희생을 선택한 영웅처럼 보여지는 것은 아닌 듯 싶어요. 당시 고려대에서 한달 정도 합숙 훈련까지 함께 했어요. 저도 그렇고 고려대 측에서도 그렇고 무조건 고려대로 가는게 당연했던 분위기였죠. 그러다가 졸업시험을 쳐야되는 관계로 고등학교로 복귀했더니 교장 선생님이 조용히 부르더라고요. 고려대는 너 한 명만 필요로하지만 한양대를 가게 되면 친구 두명이 더 대학을 갈 수 있다며 진학 방향을 바꿔줄 것을 요구했어요. 크게 고민은 안했어요. 저를 굉장히 예뻐하던 분이셨거든요. 성동공고에 온 것도 교장선생님 영향이 컸고요. 한양대로 가기로 결정하고 고려대 숙소에서 이른바 야반도주를 했어요. 새벽까지 기다리다가 모두 잠든 틈을 노려 이불 등을 가지고 몰래 빠져나왔죠. 지금 생각해보면 그깟 이불이 뭐라고 꾸역꾸역 들고 나왔는지…(웃음) 어찌됐든 그렇게 한양대를 가게 됐고 한동안 고려대 선배들에게 꽤 많은 오해를 받기도 했어요.

​Q.3점슛이 없던 시대임에도 슈팅능력을 앞세워 고득점 머신으로 거듭났어요.
어차피 당시에는 다같은 조건이니까요. 3점슛만 없었겠어요. 바스켓 카운트도 없었어요. 거기에 경기 종료 3분 전에는 감독에게 선택권이 있었어요. 파울을 당하면 프리드로우를 쏠 것인지 아님 사이드아웃에서 시작할 것인지 말이에요. 지금 시대에서 보면 굉장히 신기할거에요. 어쨌거나 장단점은 있었겠지만 고득점을 올리기에 좋은 환경은 아니었어요. 그럼에도 강호 고려대를 상대로 46득점인가를 쏟아붓기도 하고 수시로 40득점 이상을 올리고는 했죠. 제가 생각해도 당시 득점력에 물이 올랐던 듯 싶습니다. 3점슛 거리 근처에서 쏴댄 슛도 상당히 많고 파울도 수시로 당했다는 점을 감안 했을 때 지금 기준으로 바꿔보면 60득점 이상도 꽤 기록했을거에요. 현재의 규칙이 적용된다면 좀 더 외곽에서 폭넓은 움직임을 가져가고 돌파시에도 더 적극적이었을 듯 싶네요.

​Q.1974년 대학교 시절 본인을 받아준 한양대에 춘계전국대학농구연맹전 우승을 안겨줍니다. 매경기 40득점 이상을 폭발시키는 엄청난 퍼포먼스를 보인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춘계가 아니고 추계에요. 인터넷 자료 등을 보면 춘계로 쓰여져 있는 곳들이 좀 있던데 추계가 맞습니다. 당시 학창시절 마지막 시합이었는데 그렇게라도 유종의 미를 거두게 되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그때보다 3학년 때 종별선수권대회가 제일 아쉬워요. 그리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음에도 한양대가 결승까지 진출했거든요. 당시 상대가 동광이형이 이끌던 전승팀 고려대였어요. 그때 제가 40득점을 했음에도 접전 끝에 아쉽게 석패하며 준우승에 그치고 말았습니다. 거의 다 이겼었는데 막판에 역전패 당했어요. 높이와 선수층에서 밀린 이유가 커요. 184cm인 제가 팀내에서 최장신이었을 정도로 높이에서 많이 열세였죠. 반면 고려대는 국가대표 센터도 있었고 포스트도 강력했죠. 거기에 백업이 변변치 않아서 체력전에서 많이 힘들었고 주전들이 파울 아웃 당하며 나가자 나중에는 코트에 남아있는 주전들이 거의 없더라고요. 너무너무 아쉬웠던 일전이었죠.

​Q.1년 선배 김동광과는 학창시절부터 많이 부딪혔군요?
고려대를 이끄는 간판스타였으니까요. 대학 시절부터 이미 최고의 스타였어요. 파워와 테크닉을 겸비한 최고의 포인트가드였죠. 사실 동광이형이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그렇게 파워형이 아니었어요. 키가 늦게 큰 케이스라 당시에는 작았거든요. 본인도 그걸 알고 기술을 더욱 갈고닦는데 매진했고 거기에 더해 웨이트 트레이닝까지 매진했죠. 작은 신장으로 큰 선수들이랑 겨루려면 힘이 있어야 되잖아요. 나중에는 그게 신의 한수가 됐어요. 고려대 1학년 때만 해도 크게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다가 키가 크고 웨이트 트레이닝을 꾸준히 한 결과가 나타나면서 언제부터인가 헤라클레스가 되어서 코트에 나타나더라고요. 기술이야 체격이 작던 시절부터 알아주던 선수였고요. 테크니션이 사이즈와 파워가 업그레이드된 상황이니 오죽했겠어요. 그야말로 대학 무대를 씹어먹었죠. 당시에는 웨이트 트레이닝에 대한 개념이 없던 시절이었는데 동광이형의 성공 이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비주류 라인을 선택한 것이요? 살짝 후회가 들 때도 있기는 했습니다”

​Q.한양대 등 이른바 비주류 라인을 많이 탔어요. 어찌보면 농구 커리어 적인 부분에서는 아쉬운 부분도 있었을 듯 싶어요.

결과적으로 그런 부분도 분명 있죠. 동광이형하고는 친해요. 지금도 골프도 함께 치고요. 그 형이 이런 말을 한적이 있어요. ‘명룡이 너 이 새끼, 그냥 나 따라서 고려대와서 함께 기업은행갔으면 얼마나 좋아. 내가 다 세팅해서 만들어줘서 떠먹여주면 너는 슛만 쏘면 되잖아’ 어차피 돌이킬 수도 없고 일리 있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동광이형같은 특급 포인트가드가 있으면 저같은 슈팅가드는 얼마나 편해요. 아마도 개인기록, 팀 기록 등에서 한결 나았을 것이고 선수로서의 평가도 달라졌겠죠. 하지만 이제와서 어쩌겠어요. 그렇게 될 운명이었던거죠.(웃음)

​Q.당시 소속팀 산업은행의 위상은 어땠나요?
사실 실업팀이라고해봤자 한국은행, 기업은행, 산업은행에 전매청까지 4팀밖에 없었던지라 서로간 별다를 것은 없었어요. 현대, 삼성같은 대기업이 뛰어들게 된 것은 나중 일이고요. 그래도 은행권 3팀이 전매청보다는 조금 나았어요. 전매청은 은행권으로 못간 선수가 가는 팀이라는 이미지가 있었거든요. 전매청은 공기업이잖아요. 때문에 거기로 가면 공무원이 되는건데 지금과 달리 공무원의 입지가 높지는 않았어요. 월급도 적었고요. ‘이것저것 하다가 할 것 없으면 공무원이라도 해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진입장벽도 무척 낮던 시대에요.

​Q.당시는 낮 12시까지 은행 업무를 보고 오후부터 훈련을 했다면서요?
맞아요. 지금 생각해보면 말이 운동선수지 그냥 직장인에 가까웠죠. 승진심사 등에서도 은근히 차별대우를 받았고요. 일보다 운동만하는 너희들이 뭘 알겠느냐는 인식도 깔려있었겠죠. 그런 이유로 농구를 일찍 그만둔 선수들도 많아요. 길지 않은 선수 생활보다 직장인으로서의 삶을 선택한거죠. 빨리 은행 업무에 집중해야 과장 직함이라도 달아볼 수 있을 것 아니에요. 어쨌거나 설움도 많이 당했는데 그럴줄 알았으면 동광이형 말마따나 기업은행으로 갈걸 그랬다는 생각도 가끔 들었죠. 다른 곳은 은행장인데 거기만 총재라고 하는 것 만 봐도 알 수 있듯이 한국은행, 산업은행은 국가가 운영하는 곳이었잖아요. 아무래도 여러 가지 부분에서 좀 짰어요. 거기에 비해 기업은행은 선수들에 대한 대우가 좀 나았거든요. 신동파 선배도 기업은행 출신인데 한양대 시절부터 저를 참 예뻐해주셨어요. 수시로 기업은행으로 오라고 했지만…, 사실 못간 데는 사정이 있어요. 학창시절 저나 동기들을 그렇게 괴롭히던 선배가 한명있었는데 기업은행에 있더라고요. ‘에이! 저 선배있는 곳은 안간다’그렇게 됐던 거죠.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었는데요.(웃음)
 

 

“윌리포드 선택, 신의 한수였습니다”

​Q.프로화 이후 금융권팀들이 줄줄히 해체를 선언하는데 산업은행, 한국은행 선수들을 주축으로한 나래의 창단 감독으로 선임됩니다.

당시 한국은행은 이미 해체가 된 상태였고 제가 맡고 있던 산업은행 역시 1년 후 해체가 예정되어있었어요. 그러다가 프로농구가 시작됐고 나래가 산업은행, 한국은행 선수들을 주축으로 새로운 팀이 만들어졌죠. 어쨌거나 당시 선수들에 대해서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저였던지라 ‘니 새끼들이니 니가 한번 책임져봐라’고 되어서 제가 나래 감독을 맡게 됐습니다. 사실 SK전신 한국이동통신에서도 감독제의가 왔어요. 하지만 저는 예나 지금이나 막 계산을 하면서 팀을 선택하지는 않는 것 같아요. 전력만 놓고 보면 대학 스타들을 상당수 데려올 수 있던 한국이동통신 쪽이 더 솔깃할 수 있었지만 그냥 먼저 제의를 해준 나래를 택했어요. 물론 정든 선수들이 함께 있는 팀이라는 부분도 영향이 있었지만요.

​Q.첫 시즌 취약한 국내선수층에도 불구하고 챔피언결정전까지 진출해요. 정인교 외에는 이름값높은 토종선수가 없었지만 제이슨 윌리포드, 칼레이 해리스라는 외국인 듀오가 대박난 영향도 컸던 듯 싶어요.
맞아요. 지금과 달리 외국인선수 2명 출전제이기도 하거니와 원년인지라 외국인선수에 대한 수비방법 등도 전혀 없던 시절이었잖아요. 베스트5 중 2명이고 사실상 팀전력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데 어떤 선수를 뽑느냐에 따라 팀전력이 확 바뀌는게 당연하죠. 사실 1라운드에 뽑은 해리스같은 경우는 조금의 고민도 없었어요. 눈여겨보고 있었거든요. 문제는 저희 앞 순번인 SBS에서도 해리스를 노리고 있는 기색이었단 말이에요. 우리까지 기회가 왔으면 좋겠다는 바램만 가지고 있었는데 그때 변수가 제럴드 워커였어요. 워커는 당시 국내에서 흑인선수를 바라보는 동경 어린 부분이 모두 포함되어있던 선수에요. 말 그대로 아시아 선수와는 차원이 다른 운동능력과 탄력으로 덩크를 펑펑 꽂던 타입이잖아요. 워커의 플레이를 보고 두 양반이 말그대로 뻑이 간 것 같더라고요. 그리고 SBS에서 워커를 뽑는 순간 ‘됐다!’싶었죠. 그리고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해리스를 선택했습니다. 문제는 2라운드에서 누굴 선택하느냐는 것이었죠. 1라운드에서 단신 에이스감을 뽑았으니까 센터를 볼 선수가 필요했는데 쉽게 감이 안오는거에요. 당시에는 각 라운드당 10분 안에 선택을 해야했어요. 해리스를 바로 지명해서 사실상 20분 정도 시간이 있었습니다.

​Q.그렇다면 윌리포드는 말그대로 그냥 찍은 것인가요?
아니죠. 그럴 리가 있나요. 20분이라는 시간을 알차게 써야겠더라고요. 마침 산업은행 시절부터 함께 하던 선수가 있는데 이 친구가 영어에 능했어요. 그래서 현장에 있던 대학 코치에게 가서 ‘남아있는 선수 중 누가 가장 쓸만한 재목인가?’ 추천을 좀 받아오라고 했어요. 그러자 대학코치가 윌리포드를 추천했어요. 194.4cm의 신장에서도 알 수 있듯이 본래 윌리포드는 포지션이 슈팅가드에요. 거기에 공격보다는 수비에 중점을 두며 뛰던 선수라고 하더군요. 하지만 원체 스마트해서 어떤 역할을 맡겨도 잘할 것인지라 본인같으면 윌리포드를 선택하겠다는 의견을 내놓았습니다. 더욱이 농구와 더불어 미식축구도 해서 그런지 몸이 두꺼워요. 이른바 통이 좋다고 하죠. 머리가 좋은데다 기본적인 파워가 탄탄하니까 기본 이상은 할 것 같더라고요. 미국 현지에서는 약점이 두드러질지 몰라도 아시아 무대에서는 잘 먹힐 듯 싶었습니다. 어차피 저는 빠른 농구를 하려고 마음먹고 있었어요. 어설프게 크고 느린 선수보다는 내외곽에서 빠릿빠릿하게 잘 달리는 선수가 더 어울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고 최종적으로 윌리포드를 낙점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기아와의 챔피언결정전은 정말 아쉬워요. 2차전인가 3차전인가에서 윌리포드가 부상을 입었거든요. 붕대도 감고 주사도 맞고 하면서 투혼을 불살랐지만 기아같은 강팀을 상대로 그렇게 해서는 어렵죠. 윌리포드만 건강했다면 우승은 몰라도 더 잘 싸웠을 것은 분명합니다.

​Q.윌리포드와는 정말 깊은 인연을 쌓아갔다고 들었어요.
깊었죠. 비록 외국인선수와 감독으로 만났지만 이후에는 서로를 부자 관계같이 생각했어요. 필라델피아 트라이아웃 때 윌리포드 아버지를 만나 함께 술도 기울이며 정도 나눴고…, 마침 저와 나이도 같더라고요. 폴란드 백인 여성인 윌리포드 어머니같은 경우는 교육열이 넘친다고 할까요. 아님 여장부라는 표현이 맞을런지…, 폴란드 또한 교육열이 높기로 유명한 나라잖아요. 한번은 전화로 그러더라고요. ‘윌리포드가 말을 안 들으면 때려서라도 교육시켜라. 한국에서는 당신이 아버지니까 사랑의 매도 허락한다‘고 따로 전화로 말해왔을 정도니까요. 윌리포드 역시 저를 아버지처럼 따랐어요. 역대로 따져도 외국인선수와 감독의 관계가 이런 경우는 드물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Q.첫 시즌 이후 해리스와는 재계약을 하지 않았어요.
어휴…, 감당이 안됐어요. 우리와 정서와 문화가 다른 외국인 선수의 특성상 어지간한 것은 다 이해하고 넘어가려고 했는데 해리스는 그 선을 넘어갔어요. 원년 팬들은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이 친구가 테크닉과 득점 생산력은 매우 좋은데 상당한 헤비 볼핸들러에요. 아니 그런 점은 좋다 그거에요. 당시 우리팀 상황에서는 에이스가 필요했으니까요. 하지만 경기중에도 감정 기복이 심해서 혼자 북치고 장구치다가 뭔가 잘 안풀리거나 갑자기 기분이 상해버리면 정신줄을 놓아버리는거에요. 막 짜증내고 화내고 플레이도 무성의하게 하고, 그러다 보니까 삽시간에 팀 분위기가 엉망이 되는거에요. 가장 심각한 것은 성향이 매우 폭력적이다는 부분이었습니다. 당시 외국인코치가 있었는데 수시로 그 코치를 총으로 쏴서 죽이네 마네 하는가하면 경기중 혹은 다 끝난 상황에서도 상대 선수들을 그렇게 깠어요. 그러다가 큰 싸움으로 번질 뻔한 적도 있고…, 그 친구가 아들도 있었거든요. 제가 두어달 정도 한국에서 데리고 있었는데 자기 아들하고도 그렇게 싸워요. 하여튼 다툼과 분란이 너무 잦다보니 안되겠더라고요. 실력만 있으면 뭐해요 인간이 안됐는데.

​Q.윌리포드가 배우 김혜수를 무척 좋아했다는 얘기도 있어요.
많이 좋아했죠. 한국말도 못 알아들으면서 김혜수만 텔레비전에 나왔다 하면 그렇게 집중을 해서 보더라고요. 저 여자와 결혼을 하고 싶다나 뭐라나. 실제로는 못 만나본 것으로 알고 있는데 정말 열성 팬이었던 것은 맞습니다. 어쨌거나 윌리포드하고는 아쉬운 것도 많아요. 좀 더 오래 함께하고 싶었는데 기아로 트레이드되어서 갔잖아요. 당시 트레이드는 제 의지하고는 관계가 없었습니다. 헌데 이 친구는 감독이 모든 것을 추진한 줄 알고 저를 그렇게 원망하더라고요. 나중에 악동 이미지도 쌓였는데 나래 있을 때는 정말 순둥이였어요. 기아로 가고난 후 성질도 자주 부리고 이전과는 달라진 모습을 보이더라고요. 이후 오해는 풀었지만 그 친구만큼이나 저도 아쉬웠던 것이 사실입니다. 현재는 회계사 아내와 결혼해서 자신의 모교에서 헤드코치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언젠가 기회가 되면 직접 찾아가서 한번 보고 싶기는 하네요. 그래도 서로를 아버지, 아들이라고 불렀는데 죽기 전에는 한번 봐야 하지 않겠어요. (웃음)

 

 

“주희정, 신기성, 김승현…, 모두 잘 성장해서 흐뭇합니다”

​Q.주희정을 직접 발굴해서 키워낸 것으로도 유명해요. 모 감독에게 선수 보는 눈이 없다는 면박을 당하기도 했다면서요.

키워냈다기보다는 본인이 알아서 잘 큰거죠. 연습생으로 데려와서 이것저것 주문도 하고 그랬는데 그 이상으로 노력하면서 정말 빠르게 성장하더라고요. 그때만 하더라도 연습생이 있었는데 언제부터인가 없어져 버렸네요. 어쨌거나 주희정 그 녀석은 동아고 시절부터 눈여겨봤어요. 산업은행 시절 연습경기 할 때부터 확 들어오더라고요. 당시 고등학생 때라 슈팅 능력 등 부족한 것도 많았지만 스피드와 센스 등 장점이 더 돋보였어요. 모 감독이 저한테 선수보는 눈이 없다고 했지만 저는 주희정이 잘할 줄 알고 있었습니다.

​Q.주희정이 고려대에서 방황할 때 데려오신거죠?
그렇죠. 당시 고려대 동포지션에 신기성이라는 선배가 있어서 기회를 제대로 못 받기도 했거니와 본인을 키워준 할머니가 경제적으로도 어렵고 몸도 아파서 고민이 많았을 때에요. 그럴바에는 돈이라도 벌어서 할머니 고생 덜어드린다고 하길래 제가 나선거죠. 마침 당시 고려대 감독이던 박한 형님하고도 친분이 있었던지라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더라고요. 팀에 부탁해서 부산에 아파트사고도 남을 돈을 계약금으로 줬고 월급도 그때 돈으로 350만원인가를 책정했어요. 아무것도 검증된 것 없는 연습생임을 감안하면 파격적인 조건이었죠. 그때 주희정에게 ‘너 월급받으면 50만원만 쓰고 300만원은 할머니에게 드려라. 악착같이 모아야지’라고 말한적이 있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이게 웬걸 본인은 돈 쓸 일이 없다고 350만원 전부를 보냈더라고요. 그때 다시 한번 확신했죠. 이 녀석은 크게 될 것이다고. 그 정도로 떡잎부터 성실했던 친구에요.

 

 

​Q.이후 허재+데릭 존슨-정인교+제이슨 윌리포드 트레이드, 주희정+강병수-양경민, 김승기 트레이드가 차례로 이뤄집니다. 직접 추진하신것인가요?
앞서도 언급했듯이 제가 성격상 계산적이고 그런 부분에 약해요. 함께하는 내 식구라고 판단되면 꽉 끌어안으려고 하죠. 하지만 프로는 비즈니스잖아요. 농구대잔치 시절이야 타의적으로 원클럽맨이 된 선수들이 많았지만 프로는 서로간 필요에 의해 트레이드가 잦은 세계입니다. 그때는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아쉬움도 컸고 스스로 마음의 상처도 받았습니다. 더욱이 윌리포드와 주희정은 아들같이 생각했던 녀석들이니까요. 트레이드가 확정되고 주희정에게 말했어요. ‘너는 여기서 신인상도 받고 클 만큼 컸으니까 이제 더 큰 무대에서 날개를 활짝 펴고 제대로 한번 날아봐’라고요. 하지만 사람 감정이 그렇게 쉽게 정리되나요. 윌리포드도 그랬지만 주희정 역시 트레이드 당시에는 마음이 많이 상했던 듯 싶었어요. 한 일년 동안은 연락 한번 없었으니까요.

​Q.첫시즌 칼레이 해리스 이후 토니 해리스라는 또 다른 단신 외국인 선수도 있었고 데릭 존슨이라는 정통파 센터까지…, 실력은 있었지만 하나같이 성질이 보통이 아닌지라 마음고생이 심했을 듯 싶어요.
속이 끓을 때가 많았죠. 외국인 선수가 차지하는 비중을 생각했을 때 한번씩 그렇게 돌발행동을 하게 되면 정말 죽겠더라고요. 토니 해리스도 실력은 좋았어요. 외곽슛도 쏘면서 골밑에 빈틈이 보인다 싶으면 득달같이 달려들어 덩크슛도 꽂고 그랬던 기억이 나요. 하지만 성격이 다혈질인지라 뜻대로 안되면 그렇게 흥분을 해대요. 하지만 칼레이 만큼은 아니었어요. 토니는 그때만 불같이 타올랐다가 금세 멈춰요. 말 그대로 토니가 불길이라면 칼레이는 폭풍이었죠. 비슷한 악동같이 보여도 급이 달랐어요. 존슨도 평소에는 잘하다가 한번씩 심판판정이 마음에 안들고 그러면 갑자기 경기중에 밖으로 나가버리는 등 제멋대로인 부분도 많았죠. 휴우… 윌리포드만 있었어도 그런 꼴은 안봤을텐데요.


​Q.김승현이 들어오기 직전 동양에서 성적 부진의 책임을 지고 사퇴합니다.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었네요.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감독으로서 책임을 통감 하지만 당시 사퇴는 저도 언론을 통해서 처음 접했습니다. 이미 그렇게 한번 발표가 나버리면 앞뒤 절차를 떠나서 빼도 박도 못하게 되는 것이죠.(웃음) 나래 시절 주희정, 신기성 등과 그랬듯이 동양이라는 팀에서 김승현이라는 뛰어난 선수와도 한번 같이 해봤으면 좋았을 텐데라는 아쉬움도 들더라고요. 김승현같은 경우 신인드래프트에서 직접 뽑기도 했었으니까요. 당시 나산이 저희 앞 순번이었는데 당연스레 김승현을 뽑을 것으로 예상하고 짐짓 포기하고 있었죠. 그런데 이게 웬걸, 전형수를 뽑는거에요. 드래프트 전에 있었던 연고전에서 전형수가 펄펄 날았던 점이 영향을 끼치지 않았나 싶더라고요. 어쨌거나 무척 기쁜 마음으로 김승현을 지명했던 기억도 납니다. 주희정, 신기성, 김승현 셋은 신인상과 MVP를 모두 수상한 선수들이잖아요. 그러한 커리어의 첫 시작에 조그만 영향이라도 끼쳤다는 점에서 기분 좋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전희철, 김병철 등 선수층이 나쁘지 않았음에도 성적이 나빴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외국인 선수 농사에 실패했던 이유가 컷고 그에 더해 팀의 포지션별 밸런스도 좋은 편은 아니었죠. 전희철, 김병철에 신인드래프트에서 조우현을 높은 픽으로 뽑았지만 하나같이 공격에 강점은 있었으나 조화적인 측면에서는 아쉬웠죠. 서로 앞다투어 슛만 던지는 상황이었으니까요. 뭔가 조직적인 부분에서 시너지가 안났던 듯 싶어요. 김병철이 포인트가드를 한다고 나섰지만 잘 어울리는 옷도 아니었고요. 신장이 문제가 아니라 1번이라는 자리는 시야, 센스 등 재능적인 요소에서 타고나야 하는 부분도 있는 듯 싶어요. 조우현같은 경우는 가능성 높은 올라운드 플레이어감이었지만 전희철, 김병철 틈바구니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기에는 쉽지 않았죠. 본인도 기가 상당히 죽어있는 듯 싶었고요. 타팀에서 눈여겨보던 선수 중에 4번 수비가 가능한 박훈근이 있었어요. 그래서 조우현 카드를 쓸 수밖에 없었죠. 전희철, 김병철 등은 기량, 팀공헌도 등을 떠나 팀을 대표하던 스타였던지라 구단에서도 허락하지 않았을 테니까요. 김승현을 뽑았을 때만 해도 ‘이제 됐다!’라는 생각과 함께 나래 시절의 팀 구성을 한번 해보고 싶었지만 세상 모든 것이 마음대로 되지는 않으니까요. 어쨌든 그렇게라도 토목공사를 잘해놓으면 다음 주자는 더 편한 것 아니겠어요. 동양에서 오래 있지는 않았지만 다음 시즌 신인 김승현을 중심으로 마르커스 힉스, 라이언 페리맨 등이 팀을 확 바꿔놓으며 우승까지 차지하는 모습은 정말 멋졌습니다.

​Q.마지막으로 농구인 최명룡을 사랑하고 응원하는 팬들에게 인사 말씀 부탁드릴께요.
지금도 가끔 전화 오시는 분이 계세요. 원주에 계시는 90살이 다 되어가는 시인분이신데 나래의 열성 팬이셨죠. 아마도 그 어떤 지역보다도 원주 쪽에서 저를 기억하시는 팬분들이 많으신 듯 싶어요. 저도 그렇습니다. 원주 시절에 받았던 함성과 사랑은 죽을 때까지도 잊지 못할 것입니다. 시간이 많이 흘러서 팀명도 바뀌고 저도 다른 일을 하고 있지만 오래오래 리그를 대표하는 강팀으로 나아가기를 바랍니다.

#글_김종수 칼럼니스트​​​

​#사진_본인제공, KBL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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